보도자료

2004년 11월 20일 김영수님 '에이블뉴스'에 게재

최고관리자
2010.03.12 10:05 3,50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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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개인전 여는 구족화가 '김영수'씨

입은 나의 또 다른 팔, 아름다운 세상을 그리다.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04-11-20 12:44:55

▲ 인사갤러리 전시장에서. <사진 김진희>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구족화가로는 처음으로 단국대학교 동양화가 교수가 된 ‘오순이’씨가 있었다. 뉴스를 통해 발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에 아마도 많은 분들은 감탄을 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구족화가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구족화가는 22명. 어찌 보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다. 지난 11월 17일부터 21일까지 인사동 '인사갤러리'에서 구족화가인 김영수씨가 제3회 개인전을 열고 있다고 해서 만나봤다

잠시 구족화가에 대해서 말씀 드리면,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손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입이나 발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다

이 협회는 1956년 구족화가인 ‘에릭 스테크만’과 중부 유럽 국가출신의 유사한 장애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단지 7명으로 시작한 이 협회는 1973년 에는 세계적으로 131명의 화가들이 참여하였고, 현재는 전 세계 60여개국에 걸쳐 600여명 이상이 협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1990년에 생겼고, 현재 22명이 활동하고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김영수씨다

김영수씨의 장애는 '근이양증'으로 전신 마비 장애인이다

장애를 입기 전까지는 건축가를 꿈꾸던 청년이었다. 처음 장애를 알게 된 때가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2학년 때. 그때 당시는 이것이 근육병인지 뭔지도 몰랐고, 병이 발병하게 된 시점이 검도부에서 15일 정도 합숙훈련 할 때였다고 한다. 밤에는 검도부에서 합숙훈련을 하고 낮에는 곧장 수업을 하고…. 아마도 그 때 과로를 해서인지 심하게 편도선을 앓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근육이 종아리서부터 발까지 많이 빠졌는데, 초기에는 몸이 약해져서 그렇겠거니 하고 보약을 먹는다든지 침을 맞고 뜸을 뜨고 이런 식으로 치료를 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남자나이 21살하면, 혈기왕성하고 못할게 없는 그런 때다. 그때 그런 병을 앓게 되었으니 얼마나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좌절이 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쭈어봤다. 그때 병명을 알고 “의사는 뭐라고 하세요. 그리고 그때 느낌은요?”
 
“그때 의사선생님 말이 ‘희귀하다’, ‘치료방법이 없다’ 는 식이였죠. 그리고 ‘잘 먹고, 비타민 잘 먹어라’는 정도의 이야기만 했어요.”

▲ 정보화대회 행사에서 입으로 시연하는 모습. <사진 김진희>

그래서 김영수씨는 그때 생각이 '이병은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굉장한 공포감으로 다가와, 병원에서 집까지 오는 시간을 어떻게 걸어 왔는지도 모르게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듯한 그런 느낌과 한마디로 세상의 칼라가 없어지고 무채색으로 보였다고 그때를 회상한다.

그 후 기도원을 간다든지 신앙으로 고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런 힘들었던 가운데 구족화가로서 그림을 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우연히 TV에서 구필로 그리는 어떤 화가를 보게 되었는데, 문득 내가 만약 붓을 입에 물고 그림을 그린다면 어떤 그림이 될까 그런 궁금중이 생겨 그 궁금중 때문에 한번 시도를 해봤는데, 어떤 형체가 되면서 자신이 원하는 형체가 나와 그래서 그때 “나도 해보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구족화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손보다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니까 무척 힘들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도 없다. 그래서 2시간 그림을 그리면 목이 뻣뻣하고 허리도 아프고 해서 4시간 정도는 쉬고 다시 그림을 그린다.

김영수씨는 말 그대로 완전 ‘전업화가’다. 그래서 인지 나에게는 또 하나의 궁금증이 생겼다. 그림만 그리면 경제적인 생활은 어떻게 하는지

그러나 김영수씨는 나의 궁금중을 한방에 ‘확’ 풀어 주기라도 하듯이 구족화가의 시스템에 대해 말한다

"사실 구족화가 협회 회원이 된 사람들은 상당한 행운입니다. 제도 자체도 잘 되어있고, 처음 구족화가로 가입했을 때는 물감 값 정도 지원을 받고, 한 10여년 지나면 준회원이 되는데 그때부터 어느 정도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게 생활지원금이 나옵니다

반면, 대다수 일반장애인 화가들은 전시회 그림을 낼 때 액자 값조차도 힘겨워하고 그런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에도 뜻 있는 사람들이 그런 어떤 단체들을 만들어서 문학이라든지 미술뿐만 아니라 여러 장애인들인 할 수 있는 여러 일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분야마다 후원단체들을 만들어서 후원자들이 조금씩 소액을 내고 함께 하면 큰 힘 안들이고 장애인들이 생활할 수 있는 그런 기본적인 것이 해결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 협회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나라에도 이와 유사한 협회가 많이 생겨서 정말 장애인화가들이 그림만 그릴 수 있게 지원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또 거동이 불편한 중증 장애인들에게도 어떤 자립을 할 수 있게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순간 하게 됐다

▲ 전시회 팜플렛중에서.

마침 전시회 준비를 위해 도와주고 있던 한 큐레이터를 만나 봤다. “김영수 선생님께서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세요, 입으로 그림을 그리다보니 남보다는 조금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근데 오히려 그런 것들이 크로키에서는 맛이나요. 일반인들은 일부러 억제하려는 것을 갖겠지만 김영수 선생님의 어떤 붓 놀림은 일부러 억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맛이죠. 자연스럽게 붓이 가는데로 입이 가고 목이 가다 보니까는 더 경쾌한 리듬을 많이 타요. 그래서 더 오히려 선생님이 크로키쪽으로 바꾸신 것이 더 낫지 않나 개인적으로는 그런 소견이 있어요” 라고 말하며, 이 말도 잊지 않는다


“다른 장애인들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어떤 장애를 입었다 해서 그게 절망이 아니라 그 절망들 다시 반대로 희망쪽으로 바꿀 수가 있죠. 김 선생님처럼 그림을 입으로 하는 데 ‘내가 뭘 하면 될까’ 구상은 잘 안 따라 주지만 그런 질문 속에서 누드 크로키가 나왔을 거예요. 장애인분도 ‘어떻게 할까’ 라는 절망감보다는 ‘할 수 있다’ 라는 희망감을 많이 갖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라고...

그렇다. 큐레이터의 말처럼 집에만 갇혀 있는 많은 장애인분들이 '왜 하필 나에게' 라는 절망보다는 “나도 할 수 있어” 라는 희망을 갖고 뭔가를 위해 도전하는 삶도 좋다고 생각이 들면서…. 이런 말이 있죠. '말이 씨가 된다 ‘

"하면 된다"하는 식의 자기 주입을 하고, 그 어떤 목표를 세우고 도전해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지금.
 
칼럼니스트 김진희 (ukorth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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