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공간

설날 단상斷想

김인자
2002.10.15 08:04 5,56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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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2/12(화) 23:48

설날 단상斷想

*어제는 까치설날.
어젠 까치설날이다.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는 어른들의 말씀은 나를 늦게까지 불안으로 잠 못 들게 했다.
그러다 잠깐 잠에서 깨면 불안해했던 지난밤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거울 속에
는 잔뜩 겁에 질린 눈썹이 하얀 아이가 있었다. 그 순간 으앙 울음을 터트렸고 다 자라지도
못한 아이가 할머니가 되었다고 두려움에 어쩔 줄 몰랐던 기억이 새롭다. 다른 아이들은 다
웃고 난리인데 왜 나만 그렇게 겁에 질려 울어댔는지.

다 자라서도 성탄절 이브에 선물주머니를 머리맡에 놓고 산타할아버지 선물을 기다리던 내
아이들과 어릴 적 나는 어쩌면 그리도 같은지.

*설날 세배.
갓 쓰시고 두루마기 입으신 아버지를 따라 마을 어르신께 세배를 가던 길은 파도가 높고
바람까지 불어 몹시 추웠다. 나는 어머니가 손수 지어주신 보랏빛 한복을 곱게 차려입었고
아버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라 세배 가는 길 따라 나서게 하셨지만 결코 손을 잡
아주시지는 않았다. 장갑이 없으니 저고리 소매 안에 시린 두 손을 넣고 종종 걸음으로 아버
지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 세배 받으시지요"
아버지께서 허리를 깊이 굽히시면 그때서야 나도 따라 허리를 굽혀 세배를 드렸고 그때 어
른들은 내 손에 말랑말랑한 곶감이나 사탕을 쥐어주시곤 하셨다. 어른이 계시는 방을 나올
때 절대 뒷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하셨기에 뒷걸음으로 나와 문을 열면 언제나 거기 와
락 바다가 달려들었다. 들릴 때가 많다시며 "막내야, 빨리 가자" 그렇게 재촉하시는 것도
아버지였다.

*설날 기념 사진.
차례가 끝나고 세배 드리는 일 모두 끝나면 그때서야 아이들 차례다. 동네 마당에 모여 어
떻게 놀아야하는지 작당 모의하는 일도 그때부터다. 명절만큼은 어른들 눈치 보지 않고도
맘놓고 모여 놀 수 있게 눈감아 주기 때문이다.
더러는 세배하고 받은 돈 몇 푼으로 읍내에 간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어느 설날에 찍은
사진(지금도 내 책상 위엔 이 한 장의 사진이 있지만)은 여덟 명의 친구 중에는 유일하게
나만 긴 머리에 한복까지 차려입고 있다.
사진관 아저씨는 아이들을 잘 웃기는 묘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마냥 까르륵 웃게 하던 행복 사진관 그 아저씨. 주머니에 돈을 털
어 사진 값을 치루고 나오면서 며칠 후 우리들 손에 쥐어질 한 장의 흑백사진을 상상하는
일은 얼마나 설레는 꿈이었는지.

*우리들은 가무歌舞를 좋아했다.
우리들의 명절놀이는 가무歌舞가 으뜸이었다.
목청 좋은 아이들이 먼저 노래로 분위기를 제압하면 나머지 아이들이 따라하는데 나의 경
우 아무리 해도 잘 안 되는 게 노래였고 춤이었다. 노래나 춤을 못 했다기 보다는 숫기가
없어서 제대로 실력발휘를 해 본 적 없는 아이가 바로 나였다. 그때 분위기를 돋우는 유일
한 것이 상을 두드려 박자를 맞추는 것이었는데 물론 상을 두드리던 도구는 젓가락이었다.
나는 가무보다는 앉아서 젓가락 두드리는 일이 더 좋았다고 기억되는데 그 단순한 장단 맞
추기에는 뭔가 빨려 들 듯한 매력이 있었던 것 같다. 노래에 따라 소리가 소리를 제압하고
박자가 박자를 끌어가며 가슴을 뛰게 하던 그때 우리들의 젓가락 장단. 가장 단순한 리듬과
박자는 모든 음악의 기본이 된다는 것을 안 것은 어른이 되어서였다.

가끔 텔리비젼에서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음악은 타악기를 빼고는 생각할 수가 없게 되는
데 그들 흥에 겨워 노래하는 모습에서 나는 예전 설날이면 마을 친구들과 모여 노래하고 춤
출 때 젓가락 장단을 즐기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르곤 했었다.
두드려 소리를 내는 게 음악이 된다는 것을 나는 어릴 때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뱃돈
세뱃돈을 기다리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때만 해도 평소에 아이들이 용돈
을 받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기에 어쩌다 명절에 생기에 되는 돈의 위력은 금
액을 떠나서 대단한 힘이었다. 친구들과 받은 돈을 견주며 은연중에 돈의 위력을 과시하곤
했었지만 결국 그 돈은 모아 고스란히 어머니주머니로 다시 돌려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가 원해서라기보다는 늘 생활에 쪼들리는 어머니를 보고 주머니 속에 감춰둔 돈을 내놓지
않고 견딜 재간이 없었으므로 결국은 자진해 어머니에게 드리게 되고 만다.
그러면 어머니는
일년 내내 자식들의 코흘리개 세뱃돈을 빚진 자가 되곤 하셨는데 우리들은 쓸 일이 없어도
때마다 어머니에게 꾸어준 돈을 운운하며 한 해 한 해 키를 늘리고 생각을 늘렸다.

예전 우리네 어머니들, 어린 자식들에게 세뱃돈 꾸지 않고 살아온 어머니가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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