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공간

천사에게 보내는 편지<4>

김인자
2002.11.03 10:50 4,855 0

본문


수영장에서 만난 눈 먼 소녀와 그의 선생님이야기.

열 두어 살쯤 되는 소녀가 교사로 보이는 여자의 손에 이끌려 수영복을 입은 채로 수영장
샤워실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소녀는 샤워실의 생경한 분위기에 당황한 듯 큰 소리로 고함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
지는 소녀가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고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자기만의 언어로 다
급하게 외치는 것을 본 다음에야 조금은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교사는 조금 전 수영장으로 오기 전까지 누누이 설명하고 일러주었을 말들을 다시 설명하
기 시작했습니다. 천천히 그리고 침착하게 그곳이 어떤 곳이고 어떻게 해야하는지를........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소녀는 앞만 못 보는 게 아니라 다리까지도 몹시 불편한 듯 했는데 그
날 아마도 생애 처음으로 수영장으로 외출을 나온 듯 했습니다.
처음과는 달리 소녀를 타이르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교사가 명령에 가까운 단호함을 보
이자 소녀는 그제야 물 속으로 내몰리게 될 조금 후의 상황에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바들바들 몸을 떨며 조금씩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조용히 타이르는 듯한 교사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아무 것도 아니야, 그
냥 물일 뿐이야. 네가 왜? 너도 할 수 있어.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모두가 다 하는데, 네가
왜........" 라는 말들을 연신 쏟아놓았습니다. 어쩌면 앞을 볼 수 없는 소녀에게 거대한 통 안
에 담긴 물이란 것이 도깨비 방망이처럼 피하고 싶은 적敵일지도 모르는데 그것도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시냇물도 아니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와 깊이를 알 수 없는 풀장
을 상상하기란 더욱 그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샤워를 마치고 풀장으로 더듬거리며 걸어나가는 소녀의 가는 두 다리와 무슨 일이 있어도
선생님의 손을 놓치지 않을 것 같은 그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상상해보셨는지요?
그 순간 따뜻함과 단호함을 동시에 보여준 당신은 내가 만나게 될 새로운 천사는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었고 옷을 입은 뒤 레인이 한 눈에 보이는 휴게실에 앉아 할 일 없는 사
람처럼 소녀와 당신의 행동을 유심히 그리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네 번째 천사에게.
누군가 그랬지요.
유능한 선생님이란 값싼 연민 같은 것 쉬이 드러내지 않고 때로는 자신의 종아리에 피멍
들게 하는 무언의 회초리 또한 아끼지 않으며 사랑하는 이가 기쁘고 행복할 때보다는 절망
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을 때 그림자처럼 늘 그 곁을 없는 듯 지켜주는 그런 분이라 했던가
요?
당신은 학교에서 특수 아동들을 가르치는 교사인 듯 했습니다. 그날은 수업의 연장으로 아
이 몇을 데리고 수영장으로 왔던 것이겠지요. 앞을 볼 수 없는 소녀를 수영장으로 인솔하고
온 것은 물 속에서 단지 손과 발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기술만을 가르치려는 의도는 아
니었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풀장에 온 소녀에게 아무리 설명하고 타일러도 안 되는 공포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 하다가 마지막으로 당신은 단호한 명령을 무기로 택한 것이겠지요.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장애아들의 문제점 중에는 자기중심적 사고의 고집스러움인데 그것을
잘 이용하면(예를 들면 그림을 그리거나 단순한 동작으로 어떤 기술을 익힐 때) 매우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는 그들만의 장점이라는 것을 당신이
라면 물론 알고 있었겠지요.
휴게실에서 내가 본 당신은 곧 바로 몸을 던져 소녀를 풀 안으로 이끌었고 한참 후에야 비
로소 거부해도 소용없음을 눈치챈 듯한 소녀가 오직 당신만을 의지한 채 조금씩 불편한 손
발을 움직여 물장구를 치더니 얼마 후에는 배시시 웃기까지 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가슴
이 뭉클해진 나는 시간에 좇겨 자리를 일어나면서 두 사람을 향해 마음의 박수를 치고 또
쳤지요.
설령 뜻하지 않은 자신의 장애로 평생 남들처럼 유유히 물 속을 헤엄쳐 나갈 수 없게 된다
해도 그날 포기하지 않고 단호하게 수영장으로 이끌어 그가 몰랐던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
을 가르쳐준 그것만으로도 이미 당신은 훌륭한 교사였습니다. 기회란 아무에게나 항상 찾아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후 나는 풀장에 갈 때마다 눈을 감고 헤엄치는 훈련을 몇 번인가 시도해 보았습니다. 잠
시라도 눈먼 소녀의 입장이 되어 보기로 한 것이지요. 그 막막한 두려움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지금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살아온 내가 볼 수 있었던 건 과연 무엇이
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후로도 몇 번 풀장에서 소녀와 당신을 보았습니다. 제법 여유를 찾은 듯한 소녀의 얼굴
에는 첫날 잔득 겁에 질려있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고 어떤 두려움도 당신에게만은 모두
맡길 수 있을 듯한 한결 부드럽고 푸근해진 소녀의 마음을 아쉬움 없이 읽었습니다.
처음과는 달리 당신은 목소리를 낮추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손을 내밀어 도움을 주는
지혜로움을 발휘하였고 다만 그림자처럼 소녀의 등뒤에서 묵묵히 인내하며 기다리는 당신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과 함께 언젠가는 소녀가 누구의 도움 없이도 풀장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큰
바다를 유유히 헤엄쳐 나아갈 그날을 기다리는 일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풀장에서 당신이 어린 소녀와 장난치는 모습을 보는 일은 마치 마른 스펀지에 스며드는 파
란 물감처럼 작은 행복이 내 가슴에 조용히 스미는 듯한 그런 것이었습니다.
인내와 위엄을 잃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세상을 밝게 만들어 가는 나의 네 번째 천사여.
아름다운 그림, 참, 고마웠습니다.






............................................................................................................................
김인자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