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공간

오늘의 경전 經典

김인자
2002.11.03 10:51 5,46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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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전 經典

방학을 시작한지 벌써 2주나 지나가 버린 오늘에야 우편으로 보낸 고2학년 작은 놈 성적표
를 받았습니다.
1학년이 끝나갈 무렵 담임 선생님을 뵈러 학교에 갔을 때 평소 아이의 말대로 맘씨 좋고
너그러운 인상을 가진 담임 선생님과 두서없이 나눈 몇 마디이야기 속에서 나는 아이가 이
한 해 동안 선생님으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것에 조금도 의심이 없었습니다.
담임은 우리 아이가 남자 친구가 있고 그래서 이성문제로 고민도 많을 뿐 아니라 성적이
부진한 이유에 대해서도 엄마가 그것을 알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 말에 나는 그냥 웃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아닌 듯 감히 선생님께 한 마디 했습니
다. 아이가 공부 좀 못하면 어떠냐구요. 고민이 많다는 건 걱정할 일이 아니라 그 나이에 당
연히 치뤄야 할 통과의례 같은 것 아니겠느냐구요.
인문계 학교에서 부진한 성적을 걱정하기는커녕 공부 안하고 못하는 일이 마치 자랑거리라
도 되는 듯 너무나 당당히 말하는 나를 보고 담임도 그냥 웃었습니다. 그때 담임의 웃음 속
에는 나만 느낄 수 있는 묘한 안도감이 전해져 왔습니다.
한 때는 상위권을 달리던 성적이 떨이지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쯤인 것으로 기억하는
데 늦은 사춘기로 아이가 몹시 혼란스러워 하던 때에 사사건건 아이를 문제 삼는 담임 영향
때문인지 아이는 점점 가장 어두운 자신 속으로 숨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참고 기다리는 일 외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
도 없었으니까요.
늘 우수한 성적에다 공부만 하는 제 언니와 비교되는 아이의 상한 자존심을 지켜주어야 겠
다는 생각이 든 건 아이의 성적이 바닥을 헤맬 때였습니다.
하기 싫은 공부를 해야하는 고통에 대해 우리는 너무 일방적인 요구로 아이의 소중한 꿈을
깬 건 아니었을까요?
공교롭게도 아이는 2학년이 되어서도 같은 선생님을 담임으로 모시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어느 날 단체기합으로 다리에 싯퍼런 멍자국을 달고 와 놀라는 내 앞에서 아이가 끝까지 선
생님을 옹호하는 걸 본 뒤 이젠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과 기대감이 동시에 밀려들었고
나는 아이를 믿었습니다. 성적만이 아닌 건강한 마음을 기대했던 것이지요.

오늘 받은 성적표에는 내 믿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양'이나 '가'가 대
부분이었던 성적이 '수'로 바뀐 것, 그것만으로 아이를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아이는 건강
해졌고 건강해진 만큼 사랑스런 행동으로 나를 더 이상 실망주지 않으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지
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믿고 기다리는 일 뿐이었는데 아이의 성적표에는 어느 무엇으로도 만날 수 없는 경전 같은 가르침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성적표 하단에 담임 선생님이 쓰신 한 마디는 "지혜로운 사람은 그 때에 최선의 길을 찾아
간다" 그것이었습니다.
내 아이의 수고와 노력도 기특하지만, 못나고 부족한 아이를 이처럼 건강하게 이끌어 주신
담임이야말로 정말 멋진 선생님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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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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