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공간

아직도 이런 일로 슬픔을 느껴서야!

김인자
2002.11.03 10:53 5,76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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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로 슬픔을 느껴서야 ?

얼마 전 여름 휴가로 지리산 세석산장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밤새도록 쏟아지는 비 때문에 밖에 나가 기대하던 달이나 별을 볼 수도 없었고 산장 실내
벽에 걸린 지리산 야생식물의 표본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 이름들 수첩에 하나 하나 적고 있
을 때 10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 하나가 내 앞을 가로막고서서 사진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식물의 사진 밑에는 이름이 가장 먼저 있고 그 다음 괄호 안에는 무슨과에 속한다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그 밑줄에는 무슨 영문인지 한 줄이 완전히 테잎으로 가려져 있었다. 나도
그게 뭘까? 궁금해하던 차에 아이의 호기심이 앞장서 그 문제의 하얀 테잎을 뜯어내고 말았
다. 그리고 그 안에 감추어진 글씨를 읽기 시작했다.
서둘러 아이를 나무라고 싶었지만 나도 그게 뭘까 궁금하던 터라 참고 지켜볼 수밖에......
뜻밖이었다. 테잎으로 감추어진 글씨는 다름 아니 그 식물의 효능. 효과였다. 그때까지도
나는 무슨 영문인지 이해가 안 갔다.
등뒤에서 아이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관리인이 다가와 아이를 나무라며 떼어낸 테잎을
황급히 다시 붙였다.

아이가 관리인에게 질문했다. "아저씨. 이 테잎 와 붙여놓았는데요?"
관리인이 대답했다. "와 붙여 놓기는, 사람들이 이거 어디에 좋다고 하면 다 파 갖고 가니
까 그라지!"

깨알같은 글씨로 수첩에 그 꽃 이름들을 적던 나는 그만 할말을 잃고 말았다.
슬펐다. 다음 날 아침, 그 산장을 벗어날 때까지 내 눈을 피해가지 못했던 문제의 하얀 테
잎은 계속 나를 슬프게 했다.
아직도 이런 일로 슬픔을 느끼다니!


내 수첩에 적은 지리산 야생식물
배풍등(가지과). 물봉선(봉선화과). 패랭이꽃(패랭이꽃과). 투구꽃(미나리아제비과). 좀작살
나무(마편초과). 맥문동(백합과). 큰개별(패랭이꽃과). 큰까지수(영초과). 새삼(메꽃과). 씀바
귀(국화과). 산작약(작약과). 노박넝쿨(노박넝쿨과). 가을가재무릇(수선화과). 자귀나무(콩과).
큰꽃으아리(미나리아제비과). 산오이풀(장미과). 찔레나무(장미과). 누린내풀(마편초과). 마타
리(마타리과). 층층나무(층층나무과). 개망초(국화과). 장구재(패랭이꽃과). 구슬봉이(용담과).
산비장이(국화과). 황금(꿀풀과). 생강나무(녹나무과). 향유(꿀풀과). 자주꽃방망이(도라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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