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공간

천사에게 보내는 편지<5>

김인자
2002.11.03 10:53 5,17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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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게 보내는 편지<5>

나의 1차 여름 휴가는 산행을 택했습니다.
지도를 펼쳐놓고 미리 마음으로 떠나보는 지리산 세석평전의 들꽃 밭 생각해 보셨는지요?
평소 산행하는 훈련이 별로 되어있지 않았던 나로서는 그것도 짐을 질 수 없는 늘 시원찮
은 허리와 한 여름의 변화무쌍한 날씨가 주는 위압감을 감안하면 실로 모험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안락한 휴식보다는 나름대로 고행을 택하는 것으로 휴가를 어떻게 보낼까 하
는 고민에서 일찍이 해방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준비는 간편한 복장과 우비. 등산화와 양말. 그리고 배낭엔 비상식량과 고행을 즐기려는 마
음이 전부였습니다.
첫 산행은 경남 산청군에 위치한 거림에서부터 시작. 출발 시간은 7시 30분. 약 30분쯤 걸
다보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서둘러 하산하는 사람들은 지리산 전역에 호우주
의보가 내렸으니 돌아가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빗속을 뚫고 땀과 빗물로 옷을 적시며 묵묵
히 그리고 내 자신에게 수없이 타일러온 말 천천히, 천천히만을 주문하며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약 6시간 후 내가 도착한 곳은 세석산장. 한 치 앞을 볼 수 없게 했던 비바람은 밤이 되어
서도 멈출 줄 몰랐고 긴 밤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고 있을 그때 우리 앞에 나타난 눈빛 맑
은 건강한 청년 한 사람.
나는 그가 내가 만난 다섯 번째 천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나의 다섯 번 째 천사에게
그 밤 세석산장에서 빗소리와 바람소리에 두려움 반 설레임 반으로 불안해하고 있던 우리
들에게 당신은 계면쩍은 웃음과 양손으론 눌러쓴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어떤 즐거움도 가져
다 줄 전령사처럼 나타났지요. 당연히 우리는 그곳에 근무하는 직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라고, 자원봉사자라고 당신은 당신을 소개하기 시작했지요.
광주에서 왔고 산이 좋아서 산을 택했고 일년에 얼마 정도는 산에서 머물며 산행하는 사람
들을 돕고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을 정리하고 자연을 복원하는 일에 일조를 하고 싶다는
자원봉사자로서의 작은 소망을 이야기했던가요.
이야기 중 가끔씩 웃어주는 당신의 입가에서 나무를 닮은 푸르름이 보였습니다.
그 밤 우리들의 두서없는 질문은 계속되었고 끝까지 무엇이든 도움을 주려고 했던 당신의
진실한 눈빛은 폭우 속에서 불안해하고 있는 우리들의 가슴을 위로해 주는데 조금의 손색도
없었습니다.
자연에 봉사하는 자원봉사자?
나는 마음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신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밤새도록 빗소리를 안고 뒹굴어야 했던 밤이 끝나고 아침이 왔을 때 비는 멈추었고 우리는
다음 목표를 향한 산행을 계속 할 수 있으리라는 안도감에 서둘러 산장을 떠나야했습니다.
그때, 우리들 등뒤에서 '좋은 산행이 되십시오' 라는 당신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는 뿌연 산
안개를 맑게 걷어 가는 한 줄기 바람이 느껴졌습니다.

장터목산장을 거쳐 천왕봉을 오르고 다시 그 길을 되돌아오는 숲길에서 문득 다시 만난 당
신은 지난밤과는 다른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반가움과 놀라움이 컸습니다.
짙은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당신의 손에는 반쯤 채워진 쓰레기 봉투가 들려져있었는데.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산행에 지쳐 있는 우리들 모두 제 한 걸음 놓기도 바쁘고 힘든데 당신은 구석구석 버려진
쓰레기를 그 깊은 산 속에서 찾아내고 있다니요.
나는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무겁다는 이유로 내 양심 한 귀퉁이 몰래 슬쩍 그 눈부신 자연
에 버리고 오는 건 없는지 뒤통수가 부끄럽고 따가워 숨어버리고만 싶은 그때, 당신은 다시
밝게 인사를 건넸지요. '조심해서 내려가십시오' 라고. 산에서 만나는 사람 모두가 그렇게 인
사를 했지만 그토록 마음이 담긴 인사는 처음이었습니다.
그 순간 쓰레기 봉투를 들고 있던 당신의 손을 본 것은 정말로 행운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을 보았으니까요.
그날, 10시간이 넘는 지치고 힘에 겨운 무리한 초보 산행에 힘을 실어준 것은 쓰레기봉투
를 들고 있던 당신의 손과 진심 어린 눈빛이었습니다.
끝내 이름을 묻지 않았던 것은 자연에 봉사하는 자원봉사자 그 이름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
을 당신에게서 기대하는 일은 무리겠다 싶어서였습니다.
나의 여름 휴가.
지리산, 그곳에서 당신을 만난 건 행운이었습니다. 산을 내려와서도 끝내 나를 따라온 건
계곡의 물소리와 장터목의 들꽃과 당신의 진심 어린 눈빛이었음을 당신은 상상이나 하실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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