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공간

천사에게 보내는 편지.8

김인자
2002.11.03 10:59 5,35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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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게 보내는 편지.8
-늘 잘못했다고 말했던 당신-

내겐 오랜 동안 가슴 깊이 숨겨둔 천사 한 분이 계십니다.
깡마른 몸매와 단아하고 검소한 복장에 도수 높은 안경을 끼시고 조용조용 걸음을 놓으셨던 그분은 한 손에는 언제나 성경책을 들고 계셨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제 곁에서 잠시 부재중인 분이지요.
넉넉지 못한 생활 속에서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으시고 오직 가족과 교회 일로 일생을 사신 처음 뵈었을 때 그분은 덥석 내 손을 잡아주시며 순간에 따스한 교감을 주셨는데 그후 우리가 한 가족이 된지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체온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너무나 여리고 너무나 따스했던 그 분.......

천사님께
제가 처음 천사님을 뵌 건 77년 가을이 깊어 갈 무렵이었습니다. 보다시피 이렇게 변변찮은 집안인데 그래도 한 가족이 되어줄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던가요?
나는 오랜 동안 고아나 다름없어서 화목한 가정만 보장된다면 어떤 희생이라도 마다할 이유가 없을 듯 싶은 정말 외롭고 고달픈 생활을 해오던 터라 당신의 제의는 감사하다 못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요. 꿇어앉은 다리를 펴게 하시고 그때 제게 주신 말씀은 당신을 도와 우리 함께 정말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시어른들께서 가지고 계실법한 권위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정 많은 막내 이모처럼 저를 대해주셨지요.
그후 나는 당신과 한 지붕 아래에서 잠이 들고 아침을 깨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으로 나가면 어느새 당신은 새벽기도를 다녀와서 아침준비까지 끝내놓고 투닥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워 미안하다며 도리어 어쩔 줄 몰라 하셨고 그때마다 나는 쥐구멍을 찾느라 몸둘 바를 몰랐지요.
대식구를 거느리고 산다는 것도 그랬지만 언제나 고생은 당신 하나로 끝내야 한다며 할머니께서 한 마디 하실 때마다 민망하게 어찌나 저를 감싸곤 하던지요. 참 끔찍이도 저에 대한 사랑은 세심했고 깊었습니다.
나는 잘해보겠다는 의욕만 있었지 세상 물정 아무 것도 모르던 때라 좀 지나치다 싶게 가끔은 할말 못 할말 또박또박 대답도 서슴지 않았고 이건 이래야 되지 않겠는가 혹은 저건 저래야 되지 않겠는가 말도 안 되는 항변을 하지 않았던가요?(그땐 그게 제일 잘나고 똑똑한 줄 알았습니다) 참, 몹시도 철부지였지요.
당신 쓰러지고 난 뒤 누워서 산 세월 7년은 한 여자의 일생이 어떤 것인지를 눈물나게 가르쳐 준 살아있는 교훈이었습니다.
수족을 못쓰는 것도 그랬지만 뇌의 이상으로 당신이 어린아이로 되돌아갔을 때 나는 절망보다는 위로가 컸습니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당신을 보는 일은 죽음처럼 나도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테니까요.
사람들은 왜 저렇게 착한 이에게 몹쓸 병이 들었을까 간병하는 저를 위로한답시고 의아한 듯 탄식했지만 평생 성경책과 기도로 사신 당신께 그러한 병을 주신 건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아무 걱정 없는 어린아이로 살라는 그분께서 주신 마지막 축복이라 생각하고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가끔 내가 힘들어 죽겠다고 펑펑 눈물을 쏟으면 아무 영문도 모르는 아기들이 엄마를 따라하듯 당신도 나를 따라 펑펑 눈물을 쏟았지요. 그리고 잘못했다고, 잘못했다고, 내게 말하지 않았나요? 뭘 잘못했냐구 하면 당신은 다 잘못했다고 했어요. 아무리 잘못 한 게 없다고 해도, 아니라고, 다 잘못 했다고, 힘든 나를 아프게 위로하였지요. 당신이 이유도 없이 내게 잘못했다고 말할 때 교만이 컸던 나도 얼마나 가슴아프고 속상했는지 당신은 짐작이나 했을까요?
많은 식구들을 그토록 화목하게 이끌어 온 것도 생각해 보니 일이 있을 때마다 조건 없이 당신이 부족해 생긴 일이라며 언제든 앞서서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희생적 사랑이 밑거름이 되었었다는 것을 알았지요. 늘 잘못했다고 먼저 말해서 내 맘을 아프게 했던 당신.
그때 당신이 가르쳐 주신 스스로 낮아짐으로서 조화로운 가정을 이끌어 주셨던 사랑의 힘을 우둔한 저는 이제야 조금 알 듯도 싶습니다.
7년. 너무 긴 투병이었지요.
그리고 어느 추운 날 당신은 우리 가족 모두를 그대로 두고 홀로 떠났지요. 내 안에 천사라는 말을 처음으로 심어 준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당신이었습니다.
곁에 있을 땐 곁에 있어서 소중했고 이제는 곁에 없으니 없어서 더욱 소중한 이가 당신입니다.
사랑스런 막내딸로 자라났고, 성년이 되어서는 한 남자만을 극진히 모신 지어미였으며, 지혜로운 며느리였고, 현명한 어머니였던 당신. 누가 뭐라 해도 내게는 아름다운 천사로 영원히 남을 나의 시어머니, 김영애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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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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