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공간

천사에게 보내는 편지<9>

김인자
2002.11.03 10:59 5,95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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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게 보내는 편지<9>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작은 골목 코너를 끼고 있는 우리 집 앞은 전봇대 때문인지 아니면 오가는 길목이라서인지 누구나 쉽게 쓰레기를 가져다 놓곤 합니다. 1층에 버젓이 가게가 영업을 하고 있지만 나는 2.3층에 살고 있으니 일일이 그것을 통제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지 사람들은 맘 놓고 쓰레기를 버리는 것 같습니다.
동사무소 직원이 무단 투기시 적발되면 벌금이 얼마고 어떤 처벌을 받는 다는 등 경고문이 적힌 현판을 몇 달간 세워 놓긴 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전봇대를 도배한 황색 경고문 또한 흔한 광고물 보듯 시간이 지나면 무색해졌습니다.
주민들의 신고로 한 때는 미화원들이 밤에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는 사람을 잡는다고 악취에 시달리며 늦은 밤까지 잠복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그것 또한 지속적인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시간이 흘러 분리되지 않은 쓰레기 버리는 사람을 만나도 할말을 잊고 산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래, 버릴 테면 버려라. 우리 집 앞 한 곳이 더러워져서 세상이 모두 깨끗해질 수만 있다면 모두 우리 집 앞에 버려다오. 얼마나 자기 집 깨끗하게 가꾸고 싶었으면 남의 집 앞이겠느냐,' 그렇게 포기 반 체념 반 심리가 사람들의 그릇된 버릇을 더욱 부
채질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루는 아무 생각 없이 대문을 나서는데 건너 집 대문에서부터 시작된 색다른 풍경 하나를 발견하면서 나는 입가에 웃음 아닌 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어린 천사에게.
내 상상력이 빗나가지 않았다면 아마 당신은 이제 막 한글을 배워서 쓰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마당에서 소꿉장난이나 하고 있을 어린 소녀겠지요.
낡은 앞집으로 새로 이사를 왔거나 아니면 건너편 골목 어느 집에 세 들어 사는 아직은 학교 문턱을 밟지 않았거나 밟았다 할지라도 이제 막 학교 구경을 했을 어린 소녀겠지요
글씨는 누가 가르쳐주었을까요?
설마 처음으로 배운 글씨가 삐뚤빼뚤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는 아니었겠죠? 하고많은 글 중에 왜 하필이면 그걸 배우려고 고집을 부렸을까요?
처음 천사께서 길가 전봇대나 벽 여기저기에 작은 스케치북에 써서 붙여놓은 글씨를 보고 가슴이 뭉클 했습니다. '그래, 이거다, 바로 이거야, 이 정도면 어느 광고 카피보다 경고문보다 설득력이 있을 꺼야.
이렇게 인간적인 호소를 사람들이 외면할 리가 없지, 이제는 쓰레기 같은 것 무단투기 하는 사람은 없을 꺼야.' 그후 비가 오면 찢어진 호소문은 젖어서 바람에 날려 사라지기도 했지만 다음 날이면 그 곳에 어김없이 새로운 호소문이 붙어있었습니다. 여전히 너무나 인간적인 글씨로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제발,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잘 정돈되지 않은 글씨가 어쩌면 사람들 눈엔 낙서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내겐 어느 것으로도 대신 할 수 없는 호소력과 설득력을 담고 있는 듯 했습니다. 한 동안 대문을 나서고 마을을 벗어날 때까지는 피해갈 수 없는 호소문이지만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유를 딱히 무엇이라 설명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본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정말 좋은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까요? 그후 눈에 뜨이게 쓰레기가 줄지는 않았지만 누구도 함부로 천사의 호소문을 찢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늘어나는 쓰레기에 할말을 잃었는지 지금은 천사의 호소문도 하나 둘 전봇대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밝은 것만 보아도 아쉬울 어린 천사에게 불량한 어른들의 양심을 보이는 것이지요.
나는 힘겹게 삐뚤빼뚤 썼을 어린 천사의 글씨 그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지긴 했지만 아무 것이나 몰래 버리는 어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메시지를 어린 천사의 손을 빌려쓰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 참을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자고 나면 천사가 붙여놓은 호소문 바로 아래 여전히 이곳저곳에 쌓여있는 쓰레기를 보며 그 천사가 커서 어른이 될 즈음이면 세상이 보다 아름다워져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쓰레기가 없어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 일을 계속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컸구요. 이 다음 천사의 어린아이에게만은 다시는 "제발,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같은 말이나 글씨 따윈 가르쳐주지 않아도 좋을 그런 세상을 위해서 말입니다.
어른들을 부끄럽게 하는 어린 천사여, 아름다운 것만을 보여주지 못하는 어른들을 대신해 무릎이라도 꿇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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