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공간

천사에게 보내는 편지. 2

김인자
2002.11.03 10:44 5,14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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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게 보내는 편지.2

올 해 내가 만난 두 번째 천사이야깁니다.
얼마 전 지하철을 타고 서울 시내 어느 역에 내렸을 때의 일이지요. 많은 사람들에 휩싸여 천천히 계단을 밟고 올라가 지하도를 빠져나가려다가 약속시간을 체크하기 위해 시계를 보니 약 10분 정도의 여유시간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내 눈이 닿은 곳은 지하도 안에 조용히 자리잡은 책 가판대였습니다.
나는 무엇엔가 이끌리듯 책이 꽂힌 곳으로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주로 시사 월간지 혹은 베스트셀러라고 연일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는 책들로 한치의 틈도 없는 가판대 앞에 서서 나는 잠시 넋을 놓고 있었습니다.
이미 사서 읽었거나 아니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의 책들을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서 맘놓고 남은 시간을 활용해 보려는 속셈만으로 조용히 구경에 넋을 놓고 있을 때 문득 좁은 구석에서 조용히 내 마음을 두드리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인사법은 여느 사람들과 별 다를 게 없는 그냥 "안녕하세요?" 가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목소리를 듣고 난 다음 고개를 돌려 그분의 얼굴을 확인하기 전 내 행동을 멈추게 하는 어떤 분위기에 잠시 할말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목소리는 모든 사람들이 앵무새처럼 떠들어대는 상투적인 "안녕하세요?" 와는 너무도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얼굴 확인하려던 일을 한 박자 늦추고 그분의 목소리가 주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함과 신뢰감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좁은 가판대 안에 그대로 서있었고 목을 길게 빼고 책 구경을 하고 있던 나는 유리문밖에 선 채로 잠시 침묵이 흘러갔습니다.
조금 후 침묵을 가르고 그분이 다시 말을 걸어왔습니다. "찾으시는 책이 있으신가보죠?" 역시 그의 목소리에는 따뜻함이 배어있었습니다. 그것을 거듭 확인한 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쁜 일 하려다가 들켜버린 아이처럼 말을 더듬거리며 "예, 그냥 책 좀 구경하려구요? 내 대답에 그분은 외국 어느 레스토랑에서 만난 백발이 성성한 머리에 나비넥타이를 한 아주 기분 좋게 예의 바른 써비스 맨이 그러하듯 한 발작 물러나 조용히 내가 메뉴를 결정할 때까지 행복한 미소로 언제까지라도 기다려줄 수 있다는 듯 웃고만 계셨습니다.
쓸모 없는 자투리 시간 10분을 투자하여 뜻밖의 행운을 얻게된 안도감과 내 마음에 새로운 천사 한 분이 다시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후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나는 또 한 통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만난 나의 천사에게.
처음 가판대에서 얼굴이 아닌 목소리만으로 당신을 만났을 때의 그 설레임을 나는 내 감정에 걸맞은 적확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나의 보잘 것 없는 글 실력에 우선 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주 잠시 꿈을 꾸듯 당신의 목소리에서 지금은 부재중인 내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반백이 되어있는 머리와 몸에 밴 예의바름과 그리고 정중하기 이를데 없는 당신의 분위기에서 말입니다.
결코 적지 않은 나이가 짐작(60대 중반을 넘은 듯한 남자 어른)되었지만 당신이 하는 일에 소신을 가지고 있는 듯 했고 그리고 누가 뭐래도 몸에 밴 정중함과 따듯함이 나는 한없이 존경스러웠습니다. 몸을 구부려 좁은 구석에서 정리를 하다가 인기척이 일어선 듯한 그때,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까지도 너무나 아름다워 보이는 당신은 천사였습니다.
그 첫 만남에서 나는 두 권의 책을 골랐지요. 메리 그레이그가 지은 <쿤둔>과 이남호의 산문집 <혼자만의 시간> 이었던가요?
그리고 수첩을 뒤져 사야할 책을 메모해두었던 것을 찾아 다시 새 책을 주문하는데 망설이지 않았지요. 그날 이후 당신은 내게 꿈을 주는 천사였습니다. 언제나 당신을 찾아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하는 당신은 진정한 나의 천사였습니다.
세상에는 참 많은 직업들이 있습니다. 일생을 지금의 당신처럼 그 좁은 가판대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에게 책을 파는 이는 부지기수로 많겠지만 당신처럼 책만 팔지 않고 따뜻한 마음을 덤으로 주는 사람은 흔치 않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단지 나이, 혹은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연륜의 여유로움 때문이었을까요? 별다른 대화 없이도 한눈에 신뢰감으로 와 닿았던 당신은 아주 특별한 올해 내가 만난 두 번째 천사로 모시고 싶습니다.
내게 혹시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 있느냐고 묻자 난색을 보이며 당신은 손을 내저었지요. 제가 감히 어떻게.......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붉히시던 모습은 겸손하다 못해 평소 나의 하잘 것 없는 교만을 한없이 부끄럽게까지 하였음은 물론 그 순간 분명 나는 적지 않은 감동으로 전율해야 했음을 이제야 고백합니다.
주문서 목록에 아주 큰 글씨로 적어놓고 온 막스 삐까르트가 지은<침묵의 세계>는 다음 주쯤에나 들리게 될 것 같습니다. 다음 주 당신을 만나러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세상이 환해지는 주말입니다.
나의 천사여. 이 더운 여름 건강하게 건너시고 오래오래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꿈을 나누어주십시오. 부디.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에 불만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거창한 일이든 아주 소박한 일이든 예외가 아니겠지요.
나의 기준으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성공이라는 지표는 아주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일을 즐겁게 소신껏 하고 사는 그것이 바로 성공입니다.
그분의 목소리에는 천사라는 이름을 달고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넉넉함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그분께서도 끊임없이 요구하고 불평하는 삶보다는 작은 일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소박한 마음을 기뻐 바라며 기대하지 않으실까요? 이 더운 여름 좁은 가판대에 앉아 책만 팔지 않고 진솔한 마음도 아낌없이 나눠주는 그분처럼 그것이 누군가에게 꿈을 주는 일이라면 더욱 더 그러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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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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