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공간

천사에게 보내는 편지<3>

김인자
2002.11.03 10:48 4,96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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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게 보내는 편지<3>

늙은 성자聖者 같고 철없는 아이 같은.........

장마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인지 불쾌지수가 매우 높은 더운 날들이 연속입니다.
그 때문인지 내 몸도 고장이 난 듯 했고 떨어진 약도 타올겸 병원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앓아 온 지병도 있었지만 얼마 전 종합검사에 '지방간'이라는 뜻밖의 결과 또한 나를 당황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늘 하던 습관대로 단골병원(단지 집에서 가깝고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에 갔습니다. 집에 있는 의학백과사전이나 인터넷의 자료로는 뭔가 아쉬울 듯 해서 직접 의사선생님의 조언이 필요하겠다 싶어서지요.
평범한 사람들에게 병원이란 늘 그렇지 않던가요. 긴장을 풀지 못한 채 의사 선생님 앞에 서야하는 심정 같은 것. 때로는 그의 말 한 마디가 환자를 죽을 병에서 살릴 수도 있고 살릴 수 있는 병에서 죽게도 만든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나도 물론 예외일 수가 없었지요.
그날, 나는 퉁퉁 부은 얼굴로 근심을 감추지 못한 채 간호사의 호명에 따라 내과 진찰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예상치 못했던 반가운 천사와의 재회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세 번째 천사에게.
당신은 아주 오래 전부터 나와 내 어린아이들이 아플 때마다 한동안 못 본 아우나 조카를 대하듯 경상도 특유의 사투리로 반갑게 맞이하며 치료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내 기억으로는 2년 이상 당신은 내과 원장님 자리에 부재중이었습니다. 그 후 병원에 갈 때마다 당신이 부재중이서 매번 다른 분한데 진찰 받고 상담하는 동안 뭔가 이건 아닌 것 같다 하는 마음과는 달리 내겐 십 년이 넘도록 단골이라는 보이지 않은 우정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몇 년만에 병원 진찰실에서 당신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환한 얼굴로 기꺼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지요. 그리고 나를 쳐다보더니 뭔가 내 모습이 심상찮은 듯 당신 특유의 목소리로 "와 이리 많이 변했능교? 길가에서 보면 몰라 보겠슴다. 우짜다 이렇게 됐능교?" 살이 쪘는지 부었는지 분간이 안된다는 어투였지만 며칠 동안 새로운 병명을 안고 고민하던 내가 무엇 때문에 병원에 왔는지도 잠시 잊고 우리는 마치 왕래가 뜸했던 오누이처럼 밝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조금 후 내가 먼저 어렵게 말을 꺼내고 있었지요. "약도 떨어졌구요. 종합진찰 결과 '지방간'이라고 해서 왔는데요" 그랬더니 당신은 빙그레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지요. "어디 보입시다. 이거요? 이까짓 것 같고 그 고민을 했습니까? 아무 것도 아입니더. 운동 좀 하고 그라고 잊아 뿌리믄 되는 기라예" 당신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힘이 넘쳤습니다. 그리고 내 말을 받아 또 한번 확인했지요. "그거 아무 것도 아니니께 병원 문 나서는 순간부터 다 잊아뿌고 먹던 약이나 잘 묵으면 아무 일도 없을 끼라예" 나 원 참, 무슨 의사 선생님께서 권위도 엄숙도 팽개치고 환자 앞에서 철없는 어린 애처럼 그렇게 웃고 떠들고 그러는지요.
반가움 때문이었는지, 지금 먹는 약도 너무 많이 먹으면 역효과일 수도 있으니 좀 쉬었다가 큰 병원가서 다시 검사 하고 난 다음에 약 타 가고 아무 걱정 말고 오늘은 그냥 가라며 등을 떠밀었지요. 수납창구로 가서 지갑을 만지고 있는데 간호사가 다가와서 일러주더군요. 계산하지 말고 그냥 가랬다구요. 오늘 내가 만난 의사선생님, 당신의 모습은 늙은 성자聖者 같았고 천진한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그런데, 뭐 이런 일도 다 있습니까?
한동안 무슨 일로 병원을 지킬 수 없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모처럼 보는 단골 환자에게 진찰비까지 사양하시다니요. 그리고 확신에 가득 찬 당신의 말 한 마디가 밤잠을 설치게 했던 환자의 고민을 한순간에 치료해 주었다는 것 당신은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부터 천사였지만 짧지 않은 날 부제중인 시간이 있어서 그후 만난 어떤 의사 선생님도 당신처럼 의리 있고 투박하지만 살가운 분을 아직은 못 만난 탓에 당신이 얼마나 환자들에게 자연스러운 최선으로 마음을 나누는 천사였는지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병원 문을 나서며 당신이 있는 진찰실을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고 했습니다. 생각만으로도 세상을 환하게 하는 당신은 내가 만난 올해 세 번째 천사가 분명하다는 기분 좋은 확신을 갖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오면서 드린 제 시집詩集 한 권은 내가 아는 이 세상 가장 훌륭한 명의名醫가 보여준 치료에 비하면 그 값이 너무 초라한 건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 몸과 마음에 병이 났을 때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은 발달된 현대 의술이나 혹은 주사.  몇 알의 당의정만은 아니지요. 우리는 모두 알게 모르게 병을 갖고 사는 환자들이지요. 그것을 치료해 줄 수 있는 첫 번째 명약名藥은 관심 어린 사랑과 지속적인 애정이라는 것에 의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에 그분의 사랑이 있다면 두말할 나위 없는 금상첨화錦上添花 바로 그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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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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